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했고,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생각이 지배하는 우리들의 세상은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는 유한한 상대적인 세계다. 비록 극소수이지만, 상대의 세계에 살면서도 생각이 끊어진 절대의 세계를 체험한 선지자(先知者)들도 있다. 생각이 끊어진 세계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깨달음의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나가면 카타르월드컵에 극적으로 우승한 아르헨티나가 나온다고 한다. 그곳에는 축구스타 '메시'가 있다면, 문학스타(?)로서는 '보르헤스'가 있다. 그는 29세에 생각이 끊어진 '절대의 세계'를 체험한 선지자(先知者)였다. 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한 서구 지성인을 각성케 하였고, '21세기의 예언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미로 정원'이 있는데, '미로공원(迷路公園)'이라고 영어로 번역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미로공원'엘 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미로(迷路)들을 연상해 보자. 그는 인생을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인연의 '미로'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매 순간 인연의 미로를 거치면서, 삶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인생역정을 통하여 여기(현재)까지 이르렀다.
인생역정 속에서 의지적 행위가 의식으로 저장된 것이 '업(業)'이다. 옛적에는 할머니들은 손자를 등에 업고 '업둥이'라고 불렀다. 꼭 맞는 말이다. 인생이란 '업(業)의 집합체'로서 아주 정교한 정신구조다. 우리는 우리 생의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연의 천(직물)을 짜고 있다. '업'은 과거(전생)부터 이어져 왔고, 지금도 이어가고 있으며, 다음 생까지도 이어 간다. 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이어지며,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한다. 행복과 불행도, 성공과 실패도, 모두가 내 책임이요 내가 받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날 '업의 미로'를 돌아보면, 40년 동안 무사히 교직에 봉직 할 수 있었던 것도, 퇴직하고도 청주지방법원에서 5년 동안이나 조정위원으로 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항주에서 5년 동안 이국의 고등학생들에게 한국문화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요 은혜'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등학교 4년 돼서야 어느 날 큰집 사랑방에서 사촌 형님이 한글의 원리를 가르쳐 줌으로써 겨우 한글을 읽을 수 있었던 지진아(遲進兒)였다. 셋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위로 두 형이 상급학교를 다니고 있는 관계로 아버지를 도와 농삿일하였다. 어느 날 동구 밖 '짐박골 재'에서 하얀 저고리에 검정색 스커트와 구두를 신은 신식여성을 난생 처음 보았다.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녀를 만난 소년의 가슴은 '쿵쿵!'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청주사범을 졸업하고 오지마을에 발령받은 최초의 여선생님이었다. 이 만남은 산골소년의 운명을 가르는 분기접이 되었다. 소년은 그날부터 "제발 중학교 보내 주세요!"라고 아버지에게 통사정하였다.
새벽5시반에 눈비비고 일어나 읍내 중학교를 매일 40리씩 걸어서 다녔지만, 꿈을 향한 소년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그 여선생님을 향한 소년의 꿈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생생하다.
"10대엔 꿈을! 20대엔 실력을! 30대엔 인간성을 키우라"라고 했다. 꿈은 이뤄진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는 클라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초등4학년 때 겨우 한글을 깨우쳐, 1959년 어느 봄날 '짐박골재'에서 여선생과 농촌소년의 가슴 뛰는 만남이 인연이 되어 선생님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보르헤스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업(業)이다.
업이란 무엇인가? 인연으로 직조된 시간의 미로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