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님이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채 길을 가다가 외나무다리를 만나게 되었다. 조심조심 지팡이를 더듬으며 가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넘어져 다리 아래로 떨어져, 가까스로 두 손으로 다리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그때 지나던 한 행인이 "여보시오, 손을 놓으세요! 발아래는 모래사장이라 손을 놓아도 괜찮아요. 손을 놓으세요!"라고 외쳤다. 사실은 매달린 발과 밑바닥사이는 불과 몇 센치 떨어져 있어서 손만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놓으라!'고 외쳐도 움켜쥔 손을 놓지 못함으로써, 장님은 팔의 힘이 탈진됨으로써 다리 아래로 떨어져서 죽고 말았다.
앞의 우화(寓話)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장님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들을 어리석어중생이라고 하는데, 세 가지 장애(障碍)가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 장애는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이 장애가 된 것을'고장(苦障)'이라고 한다. 괴로움 중에는 '몸에 관련된 괴로움'과 '마음에 관련된 괴로움'과 '사람에 관련된 괴로움'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들을 가만히 보면, 옛날에 내가 다 이렇게 저렇게 만든 데서 생겼다. 이것을 업(業)이라고 한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부터 고통이 오고, 내 몸도 과거에 내가 어떻게 이 몸을 관리를 했는가에서 오고, 내 정신도 다 나의 옛날 생활과 관련이 있다. 업(業)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오니까 '업장(業障)'이라고 한다.
이 업(業) 중에서도 좋지 않은 죄업(罪業) 지었기 때문에 고(苦)가 오지, 좋은 업(業)을 지으면 괴로움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고통이 돌아오는 죄업은 왜 지었을까? 어리석어서 '죄업'을 지었다. 어리석음을 미혹(迷惑:잘 못 보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혹장(惑障: 미혹한 장애)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고통의 '혹업고(惑業苦) 삼장(三障)'이라고 한다. 이것은 '혹(惑)->업(業)->고(苦)'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즉,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혹장)-> 죄업을 짓는 것(업장) -> 중생들이 고통을 받는 것(고장)'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그래서 이'혹-업-고' 세 가지가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며 상호 불가분적(不可分的)인 관계를 형성한다.
앞의 우화에서'장님'은 혹장(惑障)이 되고,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업장(業障)이 되며,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져서 죽는 것이 고장(苦障)이 된다. 이 삼장(三障)만 해결하면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겠다. 삼장의 해결에 초점을 맞춰 '인생의 목표'를 세 가지로 설정할 수 있다.
첫째로, 혹장(惑障)은 어리석음을 돌려서 지혜를 이루면 해결된다. 이것을 전우성지(轉愚成智)라고 한다. 지혜 등불로 장님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둘째로 업장(業障)은 악업을 멈추고 선업을 닦으면 해결된다. 이것을 지악수선(止惡修善)이라고 한다. 성경의 모세 십계나, 불교 십계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로, 고장(苦障)은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으면 그만이다. 이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이고득락'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이루려면 그 자체로는 불가능하고 '혹장과 업장'을 해결해야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의 눈을 떠야 '혹장'을 제거할 수 있다. 세상을 '너와 나' 둘로 나눠서 보는 '에고이즘'(이기주의)은 장님(혹장)이 된다. 우리는 지혜의 눈을 떠야 한다. '나'라는 소아(小我)에서 벗어나 '우리'라는 대아(大我)로 나가는 것이 지혜광명의 길이다.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장님이 두 손으로 움켜쥔 것은 허황된 집착으로서 '업장'에 해당된다. 우리의 세속적인 집착이란 '재(財: 돈, 물질), 권(權: 권력), 명(名: 이름, 명성), 애(愛: 애욕, 사랑)'네 가지로 귀결된다. 사람들이여 무엇에 집착하는가? 무엇이 그대들의 자유로움을 가두고 걱정을 낳게 하는가! 이 세상에서 천박한 집념과 불타는 애욕에 정복된 사람은 함정에 빠진 여우처럼 이리저리 맴돈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 없고, 가진 것 없으면 다시는 고통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전우성지(轉愚成智)로써 우리사회를 밝히고, 지악수선(止惡修善)으로 우리사회를 맑힘으로써,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는 복지사회가 이룩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