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인구 절벽시대를 살고 있다. 옛날에도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독신주의자가 있었으나, 요즘같이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안 낳고, 나만 편하게 살자!'는 식의 왜곡된 가치관이 사회전반에 만연(蔓延)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노인도 사라지고, 마을마저 사라지고, 이대로 간다면 국가존립조차 위협받고 있다.
얼마 전 가까운 친구의 딸이 결혼한 지 10년 만에 출산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마흔 다섯 살이 돼서야 첫 아이를 출산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이를 얻으려 백방으로 노력해 봤지만 별무 소득이라서,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하나님'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새벽기도와 필사(筆寫:성경을 베껴 쓰는 것)를 병행하였더니, 차츰 초조와 불안에 시달렸던 마음이 사라지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도 내 팔자요 '하나님의 뜻'이니, 굳이 아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평안히 지내던 차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옥동자까지 품에 안게 되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기적(奇蹟)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성령(聖靈)의 힘을 입은 사람이 이루어 내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1959년 제작된 영화 <기적(奇蹟)>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의 한 성당에서 부상당한 영국군 대위를 간호하던 수녀는, 성모마리아 상에 영국군 대위를 살려주면 자기는 하나님의 충실한 사도가 되겠다고 약속한다. 그 덕분에 완치되었지만, 그녀는 성모마리아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사랑을 위하여 수녀원을 뛰쳐나가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된다. 그녀가 뛰쳐나감으로써 뜰에 서있던 성모마리아 상도 없어졌고, 그 지방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이적(異蹟)이 일어났다. 오랜 방황 끝에 수녀원으로 되돌아온 그녀는, 없어진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깊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성모마리아상도 돌아 왔으며, 가뭄 속에 단비가 내리는 것으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60년대 고교시절 보았던 감동이 생생하다. 그 후 TV를 통하여 수차례 보았지만, 볼 때마다 식상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느낌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영화 '벤허'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병인 나병이 치유 된 것, 모세의 위력으로 바닷물이 갈라져 유대인을 구원한 것, 삼국지(三國志)에서 제갈량이 적벽(赤壁)대전에서 천지신명께 북동풍을 남동풍으로 바꿀 것을 기도함으로써 화공(火攻:불로 공격하는 것)을 통하여 조조의 군대를 섬멸한 것 등도 기적이다.
우리는 절체절명(絶體絶命) 상황에 처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불가사의한 기적과 영험을 체험한다.
기도와 기적(영험) 사이에는 과연 인과(因果)적 관계가 성립되는가? 이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희박하다. 그래서 비과학적인 낭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몸소 실천해본 사람이면 대부분이 기도에는 분명히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고 한다. 필자도 기도에 대한 효력을 실제로 체험해 봤다.
최근에 '양자역학'이 대두됨으로써 '기도와 기적'사이의 상관관계를 과학적 검증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다. 한때는 '론다 번'의 '끌어당김 법칙'이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사용하여 우주의 에너지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불교의 일체유심조(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아주 흡사한 이론이다.
명심보감에도 '정심응물(定心應物)'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면, 사물도 거기에 응답한다.'는 뜻으로서, '기도하는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야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문득 수월(水月)스님의 법문이 쟁쟁하다. 이중 하나만이라도 실천해 보자
"도(道)란 별거 아니야! 마음만 모으면 된다. 하나 둘을 세든지,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경전을 쓰든지, 글귀를 외든지, 108배를 하든지! 어찌 되었든 마음만 모으면 그만이다."